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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waits for no one

평화가 찾아왔고 나미모리에는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미래에 다녀온 이후에 많은 것이 바뀌고 결정 되었다. 츠나와 고쿠데라는 역시 봉골레 쪽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고 야마모토는 그대로 야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방학동안 많이 경험하고 잘 생각해서 써내라며 받은 장래희망 조사지에 야마모토는 샤프로 '야구선수'라는 글씨를 썼다. 늘 꿈 꿔 오던 것으로 빈칸을 채우자 기분이 뿌듯했다. 야마모토는 잠깐 그 종이를 뿌듯하게 보다가 까만 펜으로 그 위에 제대로 꼭꼭 눌러 글씨를 썼다. 굳은 다짐의 증거였다.

 

"역시 끝까지는 해보고 싶어."

 

그렇게 하라고 츠나는 흔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또 미안해했다. 부담을 지워줘서 미안해. 야마모토는 야구를 하는 게 잘 어울린다며 웃는 츠나를 보며 오히려 야마모토가 미안해질 정도였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던 고쿠데라는 야마모토와 츠나의 대화에서 한 발 물러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이 일을 우습게보지 말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 했던 만큼 고쿠데라로서는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던 결과일지도 모른다.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한 걸까. 그건 좀 마음이 아팠다.

 

츠나는 결정이 되자마자 바로 이탈리아로 떠났다. 떠나기 전날 츠나의 집에서 열린 송별회에서 츠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주었다. 이탈리아에서 교육을 받으며 봉골레 취임식을 준비할거라고, 몇 년 후 취임식 때 와줄 수 있겠냐고 해서 야마모토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쿠데라는 모든 것이 결정 되었을 때부터 조용했다. 고쿠데라가 1층에서 열린 송별회 상차림을 도와주러 내려갔을 때 츠나는 슬쩍 고쿠데라도 이탈리아 행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츠나와 고쿠데라는 이제 같은 길을 가게 된 만큼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다. 송별회는 내내 즐거운 이야기가 오갔고 야마모토와 고쿠데라는 츠나의 집에서 잠들었다. 다같이 보내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츠나는 다음 날 아침에 이탈리아로 떠났다.

 

신기한 건지 당연한 건지 츠나와 리본이 떠나자 야마모토와 고쿠데라의 일상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야마모토의 마음에는 츠나의 빈자리가 남아 허전했으나 야속하게도 다른 모든 것들은 자연히 그 자리를 메워나갔다. 제일 의외였던 것은 고쿠데라였다. 야마모토와 고쿠데라의 최대 매개체이자 거의 유일한 연결고리인 츠나가 빠졌는데도 고쿠데라는 야마모토와의 관계를 똑같이 유지했다. 츠나가 떠나면 내심 고쿠데라와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했던 야마모토로서는 기쁘지만 신기한 나날이다. 같이 등교하고 옥상에 올라가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으며 점심을 먹고, 야마모토의 부활동을 기다려주고 같이 집에 가는 그런. 부활동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은 날마다 더 밝아져 해가 길어짐을 알 수 있었고 길가의 나무들은 자각 없이도 알 수 있을만치 초록빛으로 물들어갔다. 여름 방학이 찾아왔다.

 

일상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고쿠데라는 그 흐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야마모토는 고쿠데라가 언제 이탈리아로 떠날 지 궁금했지만 고쿠데라가 일상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쿠데라가 야마모토에게 그러했듯 똑같이 침묵했다. 야마모토는 늘 같은 흐름인 고쿠데라의 다음 행동을 도무지 예측할 수 없었다. 방학으로 일상은 변하고 야구부 연습으로 방학에도 매일 학교에 가게 되는 야마모토는 그럼 연습이 마친 후에나 고쿠데라를 볼 수 있는건지 아니, 그 이전에 고쿠데라와 방학 때 볼 수는 있는 건지를 고민하며 파란 여름밤을 헤었다. 되도록이면 보고 싶었다. 매일. 또.

 

"샤멀에게 배울 게 있어."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고쿠데라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야마모토는 쉽게 납득했다. 팽팽 돌아가는 머리가 의욕껏 합당한 이유를 가져다 붙였다. 아마 봉골레 일에 관한 거겠지. 방학 때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야마모토는 설레기 시작했다. 사실 츠나가 떠난 뒤 빈자리를 누구보다 야속하게 채우고 있는 건 야마모토 스스로인지도 몰랐다. 츠나가 있을 이탈리아 쪽으로 꾸벅 인사하며 야마모토는 취임식 때 츠나를 위한 선물이라도 많이 사들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약속대로 방학의 등굣길에도 고쿠데라가 함께였다. 고쿠데라는 졸린 눈을 비비며 야마모토와 등교 한 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일본에서는 딱히 집을 구하지 않고 숙직실에서 지내는 샤멀이니 아마 이른 시간에 가도 고쿠데라가 혼자 일 리는 없을 것이다. 멀어지는 고쿠데라의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바라본 야마모토는 뿌듯한 마음으로 연습의 문을 열었다.

 

연습은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날이 더워 가을이나 겨울 때 연습과는 비교도 안 되게 힘든 시간이었다. 선배들은 체력관리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지냈으나 어떻게 해도 해가 강해지는 10시 이후부터는 엿가락처럼 몸이 늘어졌다. 첫 연습 후 일주일 동안은 고집스럽게 연습이 진행됐지만 부원들의 체력이나 사기 문제로 결국 10시에 20분간의 브레이크 타임이 추가 되었다. 유일하게 시계를 가진 주장에게서 휴식! 하는 소리가 떨어지면 누구랄 것도 없이 구본관 앞 수돗가로 뛰어가 물줄기에 땀에 젖은 머리를 들이밀었다. 야마모토 역시 땀에 젖은 머리를 물에 잔뜩 적셔내고 물을 마신 뒤에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구본관 옆 커다란 나무 그늘에 앉거나 엎어진 아이들 옆으로 야마모토도 몸을 뉘였다. 살짝 바람이 불어와 물과 땀으로 젖은 몸을 말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는 저 멀리 본관의 양호실 창문이 보였다. 수돗가에서 보이는 양호실의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보이지 않으니 더 궁금했다. 고쿠데라는 뭘 하고 있을까. 더운 거 싫어하니까 창문을 닫아놓고 에어컨 빵빵하게 켜놓고 있겠지. 그런 생각으로 실실 웃고 있으면 금방 다시 집합!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12시 30분, 점심시간은 늘 고쿠데라와 함께였다. 시계가 없었지만 야마모토는 점심 먹기 10분 전 부터는 대충 시간을 알 수 있었다. 배가 고프면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눈이 돌아가는데 그때 저 멀리 스탠드 그늘 아래 누군가 앉아있는 것이 보이면 밥 먹기 5분 전이라는 뜻이었다. 지친 몸에 설레는 마음으로 해이하게 배트를 휘두르면 30분 같은 5분이 끝났다. 고쿠데라는 조용한 것을 좋아해서 야마모토는 스탠드나 부실에서 밥을 먹는 부원들과 달리 늘 본관 뒤편에서 점심을 먹었다. 도시락을 챙겨 나가면 고쿠데라는 이미 사라져 있어서 야마모토는 스탠드를 지나쳐 본관 뒤편으로 쭉 걸었다. 여름은 자기주장이 강했다. 새파란 하늘, 짙은 초록색의 나뭇잎들, 시끄러운 매미소리와 생생한 풀 냄새. 땀을 흘리고 난 뒤의 상쾌한 기분에 그런 자극이 더해지면 가슴이 두근거리며 야마모토는 자신이 살아 숨 쉬는 존재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그래서 그 길을 걸을 때마다 야마모토는 야구를 선택한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고쿠데라와 함께 도시락을 먹고 나면 30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함께 등교하는 시간과 하교하는 시간은 타이밍이 애매했고 지금처럼 둘만 이렇게 마주보고 있을 때는 가끔 그런 이야기가 꺼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최근 고쿠데라는 입을 꾹 다물고 있어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늘 야마모토에게 화를 냈던 고쿠데라는 땅에 발을 붙인 것이 확실했는데 지금의 고쿠데라는 붕 뜬 풍선 같았다. 조용하고 허무했고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고쿠데라는 언제까지 여기에 머무를 거야?' 하고 묻으면 그대로 두둥실 떠버려서 그렇게……. 그건 싫었다. 사라지는 건. 그래서 야마모토는 매번 그 말을 참아냈다.

 

"아, 고쿠데라. 옷에 먼지 붙었어."

"뭐?"

"얼마나 열심히 한 거야."

 

웃으며 배우고 있는 건 잘 되고 있느냐고 묻자 고쿠데라는 잠깐의 침묵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더워서 오늘은 별 진전이 없었다고 그래도 어떻게 하는지 감 잡았으니까 더 잘 될 거라는 마지막에 고쿠데라가 한숨처럼 웃었기 때문에 야마모토도 웃었다. 그래? 잘됐다. 이상하게 연습하는 동안의 1시간은 더운 날씨처럼 끈적하게 느린데도 고쿠데라와 함께하는 1시간은 말도 안 되게 빨리 지나갔다. 야마모토는 고쿠데라와 인사를 하고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움직여 운동장으로 향했다.

 

1시 30분부터 3시까지 쉬는 시간 없이 달리면 그 날 연습은 끝이 났다. 좋아서 하는 일이라지만 아침부터 들볶인 지친 몸을 이끌고 마지막을 향해 뛰고 있노라면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갔다. 시계가 없는 것도 늘어지는 체감에 한 몫을 했다. 그야말로 시간과 정신의 운동장에 갇힌 기분이었다. 이럴 때 야마모토는 고쿠데라를 떠올렸다. 마치고 고쿠데라와 같이 집에 가는 길. 함께 사먹는 아이스크림. 고쿠데라의 이야기들. 고쿠데라의……고쿠데라……가슴이 조금 벅찼다. 야마모토는 멈칫 서서 제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렸다. 쿵쿵 뛰는 심장은 언젠가와 비슷한 고동을 냈다. 더 빠를지도. 야마모토는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

 

 

 

 

방학이 일주일 남았다. 그간 야마모토는 고쿠데라와 이곳저곳을 놀러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연습이 없는 날이면 둘은 나미모리 근처의 산에도 갔고 전철을 타고 바닷가도 갔다. 걱정은 당장의 즐거움 앞에서 무뎌져갔다. 야마모토는 스스로를 조이던 경각심을 느슨하게 풀고 고쿠데라와의 여름 방학을 즐겼다. 고쿠데라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버리게 됐다. 어쨌거나 고쿠데라는 여전히 봉골레나 이탈리아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니. 생각을 바꿨을지도 몰라. 그런 안일한 자기위로로 야마모토는 두려움을 덮었다.

 

어느 날의 10시 연습. 이제 슬슬 브레이크 타임이 아닌가 생각하던 중 갑자기 주위가 시끄러워 졌다. 누군가 다쳤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운동장에 엎어진 누군가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절뚝거리는 모양새에 야마모토도 배트를 자리에 두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다친 건 야마모토와 함께 에이스로 꼽히는 사카구치였다. 꽤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그는 조금 어지러워서 휘청했는데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진 것 같다고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무릎이 갈린 흰 야구복위로 아프게 피가 번지고 있었다. 주장의 지시로 사카구치는 누군가 가져 온 철제 의자에 앉았고 간단한 응급처치 후 무릎상태를 확인받았다.

 

"아야야야……."

"괜찮아?"

"아으, 괜찮습니다. 그냥 살갗이 까져서 피만 좀 나는 것 같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양호실에 가보는 게 좋겠어. 마에다! 부축 하는 것 좀 도와줘."

"네!"

 

주장과 마에다의 부축을 받으며 양호실로 향하는 사카구치를 보고 야마모토는 혀로 바싹 마른입술을 적셨다. 많이 다친 게 아니어야 할 텐데. 방학이 끝나자마자 중요한 시합이 있던 것과 그에 대해 사카구치가 보이던 의욕적 모습이 겹치며 야마모토의 마음을 짠하게 했다. 뭐하는 거야! 계속 연습한다! 부주장의 목소리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잡혔고 야마모토도 정신을 차리고 다시 연습에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10시는 지난 것 같은데 주장의 부재 때문인지 오늘 연습은 브레이크 타임 없이 이어졌다. 처음 누군가의 신음을 시작으로 하나 둘 죽어가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서슬 퍼런 부주장의 눈길에 다들 서로 눈치를 보며 연습을 이어나갔다. 얼마 뒤 주장과 마에다가 돌아왔다. 주장은 부주장에게 뭔가를 전달했고 부주장이 고개를 저으며 뭐라 대꾸했다. 대화가 길어 질 것 같았다. 마침 마에다가 야마모토의 옆 자리에서 몸풀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야마모토는 조용한 목소리로 마에다를 불렀다.

 

"무릎 괜찮대?"

"양호 선생님이 안 계셔서 모르겠어. 일단 교무실에 계신 선생님이 차에 태워서 병원에 데려가셨어."

"안 계신다고?"

 

야마모토의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좀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주장이 모두를 집합 시켰다. 안 계신다니? 야마모토는 혼자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카구치는 당직 선생님이 병원에 데려가셨는데 아마 큰 부상은 아닐 것 같다. 늘 말했듯이 부상입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주의들 하고. 오늘 날씨가 많이 더우니까 오늘은 쉰다. 집에서 쉬고 내일 보도록 하자!"

 

사카구치가 다친 건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다들 힘들긴 한 모양이었는지 네!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우렁찼다. 수고하셨습니다! 야마모토는 몸에 익은 버릇처럼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하고 터덜터덜 부실로 향했다. 아니, 향하다가 진로를 틀었다. 양호실에 가야만 했다. 고쿠데라는 늘 그곳에 있었다고 했다. 샤멀이 그곳 책상에서 떵떵거리며 진짜 선생님이라도 된 양 구는 게 열 받는다고, 가끔 너무 더워서 움직이기 싫을 때는 양호실 침대에 누워서 쉬었다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는데. 본관 건물로 들어가자 미끈한 콘크리트 바닥에서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타박타박하는 발소리만 조용한 복도를 울렸다. 기다란 복도를 가로지르며 야마모토는 어떠한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양호실 앞에 도착 한 야마모토는 후우 한숨을 쉬었다. 철컥. 옆으로 밀어 본 양호실 문은 잠겨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맴맴 하는 매미소리가 강해졌고 야마모토는 조금 멍해졌다.

 

숙직실은 양호실 바로 옆에 있었다. 그러나 학기 내내 샤멀이 지내던 숙직실도 잠겨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야마모토는 이쯤 되니 허탈해졌다. 샤멀은 이 학교에 없다. 아마 그 이전에도 없었을 것이다. 왜 거짓말을 했을까. 이번에도 저 좋을 대로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순식간에 어떤 생각이 야마모토를 뒤덮었다. 묻어 놓았던 두려움은 다른 의미로 불이 붙었다. 지금 당장 답을 얻고 싶었다. 고쿠데라. 고쿠데라를 찾아야 해. 야마모토는 뛰었다. 매끄러운 바닥에 운동화가 마찰하며 삐익 하는 소리를 냈고 순식간에 본관을 박차고 나온 야마모토의 앞으로 눈이 아플 정도의 밝은 햇볕이 내리쬐었다. 야마모토는 가속했다. 나뭇잎 사이로 부서진 유리처럼 반짝이는 금빛햇살과 나뭇잎에서 반사된 초록색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야마모토가 연습하는 동안 충분히 대기를 익혀놓은 태양 때문에 후텁지근한 공기를 갈라야만 했지만 야마모토는 멈추지 않았다. 어떤 생각에 미친 후 점점 두근대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직 갈아입지도 못한 흰 야구 복이 땀으로 푹 젖는 것을 느끼며 야마모토는 고쿠데라를 찾아 달렸다.

 

본관, 신관, 구본관 건물 주위를 모두 돌아본 야마모토는 결국 운동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고쿠데라를 찾았다. 고쿠데라는 어둑어둑한 구본관 건물 출구 옆에서 운동장을 향해 연신 두리번거리는 중이었다. 그 뒷모습이 뭔가 찾는 중이라는 것이 너무 분명해서 야마모토는 뛰어오던 걸음을 멈추고 숨죽여 고쿠데라의 뒤를 밟았다. 운동장은 텅 비었고 고쿠데라가 찾는 것은 거기에 없을 터였다. 말 해주고 싶었다.

 

"고쿠데라!"

 

엉겨있던 감정대신 목소리가 터졌다. 고쿠데라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눈에 띄게 놀란 표정에 야마모토의 마음이 더 초조해졌다. 손바닥 안의 맥박이 쿵쿵 뛰었다.

 

"너…….연, 연습은?"

 

버벅거리는 목소리가 고쿠데라답지 않았다. 고쿠데라 역시 그렇게 느꼈는지 동그랗게 주먹을 말아 쥐는 것이 야마모토의 눈에 보였다. 왜? 왜 그렇게 불안해 해? 뭐 숨기는 거 있어? 그런 말을 꺼내고 싶었는데 심장이 벅차서 꺼낼 수가 없었다. 후욱후욱. 고쿠데라를 찾아 내내 달리던 야마모토의 가슴이 아직도 가쁘게 오르락내리락 했다. 야마모토가 고쿠데라를 바라보며 감정을 정리하는 동안 고쿠데라 역시 힘을 얻었는지 가다듬은 목소리를 냈다.

 

"뭐야, 연습 일찍 끝났냐? 오늘은 일찍 가자."

 

그렇게 돌아서면 자연스러울 거라 생각했을까. 돌아서려는 고쿠데라에게 순식간에 따라붙은 야마모토가 고쿠데라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고쿠데라. 왜 여기에 남은거야?"

 

뭐? 고쿠데라는 야마모토의 기세에 밀리지 않고 눈을 맞췄다. 요새 늘 두둥실 떠 있던 고쿠데라는 간만에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위기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고쿠데라는 늘 그런 식으로 자기를 감쌌다. 그걸 알고 있으니 날카로운 눈빛에도 상처 입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더 몰아넣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샤멀에게 배워야 할 게 있다고 내가……."

"샤멀. 없던데."

 

마주친 고쿠데라의 초록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심증만 일고 물증은 없었으나 야마모토는 그냥 질러버렸다. 도루 타이밍이었다.

 

"당직 선생님께 여쭤봤더니 방학 때는 안 나온대."

"너……."

 

고쿠데라는 급히 몸을 돌렸으나 야마모토가 고쿠데라의 팔을 붙잡는 것이 빨랐다. 하야토. 늘 마음에만 담았던 이름이 새어나왔다. 야마모토가 고쿠데라를 당겨 품에 안았으나 고쿠데라가 금방 야마모토를 뿌리쳤다. 벗어난 고쿠데라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바로 뒤쪽에는 수돗가가 있어서 고쿠데라는 얼마 가지 못하고 발뒤꿈치가 수돗가의 돌 디딤대에 툭 닿았다.

 

"항상 어디에 있었어? 뭐 하고 있었어?"

"야마모토……."

"나 때문에 남은거야?"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고쿠데라의 앞을 야마모토가 막아섰다. 이번에는 도망가지 못하게 야마모토는 고쿠데라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새로운 본관 건물이 생긴 이후로 이제는 거의 창고로나 사용되는 구본관이 고쿠데라의 뒤로 보였다. 저기서 기다렸겠지. 야마모토는 방학 내내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구본관의 2층에서 자신을 보고 있을 고쿠데라를 떠올렸다. 지루한 시간을 빨리 보내는 방법. 야마모토도 방학 내내 그 방법을 썼으니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생각하면 시간이 잘 갔다. 그렇게 지루함을 참아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버텼다는 거지. 같은 거라는 거지. 그걸 알아버렸을 땐 참을 수가 없었다.

 

"미안해. 용기내지 못해서."

"……."

"언제라는 거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어. 왜 떠나지 않았냐고 물어봤어야 했지?"

"……."

"좋아해. 좋아해 고쿠데라."

 

고쿠데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학 내내 보여줬던 그런 고쿠데라는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고쿠데라의 눈빛은 감정덩어리 그 자체였다. 야마모토는 고쿠데라가 지금 자기와 똑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야마모토는 고쿠데라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맞췄다. 고쿠데라는 말없이 그 입맞춤을 받아주었다. 여전히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었고 담쟁이 덩굴로 뒤덮인 구본관에선 바람이 불어와 풀 냄새가 물씬 풍겼다. 쓰르르르 하는 매미소리 가운데서 야마모토는 고쿠데라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

 

 

 

 

 

여름방학이 끝났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인사로 어수선한 개학식은 담임이 전한 고쿠데라의 전학 소식으로 더 시끄러워졌다. 츠나나 야마모토랑만 어울려 지냈지만 혼혈에 껄렁함 속성으로 알게 모르게 주목받고 있었던 고쿠데라였기 때문에 그 날은 내내 그 이야기로 교실이 시끄러웠다. 넌 알고 있었어? 자기 의자를 끌고 야마모토의 책상 옆에 붙어 앉은 마에다가 질문했다. 야마모토는 대답 없이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새파란 하늘이 아름다웠다. 고쿠데라가 탄 비행기도 저 하늘을 날고 있을까.

 

고쿠데라는 야마모토와 함께 방학을 보내고 방학이 끝나면 바로 떠날 예정이었다고 했다. 츠나와 함께 떠나버리면 혼자 남을 야마모토가 '신경 쓰였다'고 했지만 야마모토의 끈질긴 채근에 빨개진 얼굴로 '그래, 너를 좋아해서 남은 거' 라고 털어놓았다. 즐거웠지만 이게 마지막이라는 걸 알고 있는 고쿠데라는 그래서 표정도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좀 더 일찍 이야기 할 걸. 고쿠데라의 이탈리아 행 비행기 표를 보며 야마모토는 시무룩한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장래희망 조사지 거둬 오래! 1분단부터 거둘게!"

 

앞쪽에서부터 종이를 거두던 당번이 점차 뒤쪽자리로 다가왔다. 야마모토는 책상 서랍 안의 장래희망 조사지를 꺼내 내밀었다. 옆에 앉았던 마에다가 쓱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까만 펜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에는 마에다가 생각하지 못 한 글씨가 적혀있었다.

 

"회사원? 진짜냐?"

 

찌푸린 표정으로 조사지를 빼앗아 든 마에다를 보며 야마모토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마피아라고 적을 수는 없으니. 옆에서 감독이 들으면 땅을 치고 안타까워 할 거라고 흉내를 내는 마에다를 보며 야마모토는 웃었다.

 

"오버하지 마. 고등학교 때 까진 할 거니까."

 

그리고 그 다음엔……. 야마모토는 이탈리아에 가 있을 츠나와 고쿠데라를 떠올렸다. 고쿠데라는 야마모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탈리아로 갈 거란 결정을 듣자마자 불같이 화를 냈다. 난 이런 고쿠데라가 그리웠다고 한마디 했다가 야마모토는 등짝까지 한 대 맞았다. 감정에 휩쓸려 결정하지 말라고 고쿠데라는 진지하게 충고했지만 야마모토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다 결정 된 일이었다. 츠나가 떠나던 날 츠나에게도 이미 말해두었고 장래희망 조사지를 쓸 때부터. 그간 야마모토는 야구와 마피아 일을 두고 끊임없이 고민했으나 미래에서 츠나와 고쿠데라와 함께 싸워가며 놀라울 만치 쉽게 마음이 기울었다. 츠나에게까지 말이 됐다는 소리에 고쿠데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3년 뒤에 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모두들 바쁘게 제 자리로 돌아갔다. 야마모토는 텅 빈 운동장을 보며 방학 때 쌓았던 추억을 꺼냈다. 3년의 시간은 길겠지만 야마모토는 시간을 빨리 보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금방 다시 만날 시간이 올 것이다.

俺達のJoy - 山本武/獄寺隼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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