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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you call me

  이시다가 집으로 찾아왔다. 시험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연락도 없이 불쑥 들이닥친 주제에 얼굴을 보자마자 시험은 어땠냐고 퍽 실례되는 질문이나 해댔다. 야마모토는 멋쩍게 웃고는 너는 어떠냐고 되물었다. 이시다는 자기가 내던진 칼에 찔려 죽어가는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뻔한 질문은 왜 하냐. 잘 봤을 리가 없잖아. 학고나 안 먹으면 다행이다.”

 

  야마모토는 먼저 시작한 것은 이시다 쪽임을 지적하지 않았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은 시작도 안 했건만 날이 더웠다. 이시다는 에어컨 바로 앞에 둥지를 틀고도 한참 땀을 흘렸다. 어느 정도 땀이 식었는지 그는 야마모토를 힐끔거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다.

 

  “왜?”

  “야, 게임하자.”

 

  이시다는 자타가 공인하는 게임광이었다. 새로운 게임을 시작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시다에게 먼저 묻곤 했다. 일종의 불문율이라고 해도 좋다. 게다가 그렇게 질문을 받은 이시다가 대답을 못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 그건 타격감은 좋은데 캐시가 너무 지랄맞아서. 그건 밸런스가 너무 구려. 옛날엔 괜찮았는데 요즘은 운영이 영... 아, 그건 끝내주지! 근데 초딩이 좀 많다? 그가 하는 말은 대부분 아주 정확한 지적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하다. 야마모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고물 컴퓨터를 가리켰다.

 

  “네가 좋아할 만한 건 이걸로 안 돌아갈 건데.”

  “야, 괜찮아. 이 몸은 모든 게임을 평등하게 사랑한다고.”

  “...아, 그래? 근데 애초에 게임 자체가 별로 없어.”

  “옛날 게임이라도 꺼내 봐. 중딩 때나 뭐, 그런 거 있잖아.”

 

  중학교 때 야마모토는 야구부였고, 게임 따위는 할 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 봐야 이시다는 그냥 빼는 걸로 생각할 것 같았다. 야마모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다른 기대도 없이 책상 서랍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시다는 군침을 흘리며 바로 옆에 붙어 서서 서랍 속을 구경했다. 빨간책 있냐? 야마모토는 다른 손으로 꿀밤을 한 대 쥐어박았다. 우씨, 없으면 말지 때리고 지랄이야! 불평 소리가 새됐다. 야마모토는 피식 쓴웃음을 짓다 서랍 맨 밑바닥에 놓인 그것을 보았다.

 

  “어? 이거 뭐야?”

  “......”

  “이야, 이새끼 봐라? 야, 이거 한정판이잖아!”

  “...그래?”

  “자식이 줄 서서 샀을 거면서 모르는 척이야? 여기 봐, 여기. 겉에 상자에 일련번호 써 있잖아. No. 8590... 이거 일만 장 한정 판매였단 말야! 나도 엄청 갖고 싶었는데!!”

 

  야마모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물끄러미 게임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랬구나, 한정판이었구나. 그때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학교 3학년? 아니면 고등학교 1학년? 아마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눈앞에 은빛이 아른거려 눈이 부셨다.

 

  “야, 이거 해 봐도 돼? 응?”

  “아, 아... 응...”

  “아싸!”

 

  이시다는 신이 나서 상자를 열었다. 그래도 한정판 상자라고 다루는 손길이 제법 조심스럽다. 평소의 이시다였더라면 상자 같은 건 왜 보관하고 있느냐고 한소리나 하지 않았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상자 안에는 CD 케이스와 얇은 매뉴얼이 들어 있었다. 어느 쪽이건 깨끗했다.

 

  “너 이거 별로 안 해 봤나 봐?”

  “...응.”

  “야,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 아니...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그건 빌린 거야.”

  “어, 진짜? 그럼 하면 안 돼?”

  “...아냐, 괜찮아.”

 

  찌는 듯한 여름이었다. 애초에 게임을 하고 싶어 했던 것은 츠나였던 것 같다. 한정판과 일반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엄청나게 줄을 설 거라는 짐작은 있었다. 그럴 정도까진 아니야, 좀 기다렸다 사지 뭐. 그렇게 말했던 기억도 있었다.

게임을 산 것은 고쿠데라였다.

 

  “...이시다, 너 그거 잠깐 하고 있어 봐. 나 잠깐 전화 좀...”

  “어? 아, 그래. 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고쿠데라는 이탈리아로 간다고 했다. 대학은 안 갈 거냐는 야마모토의 질문에 그는 그냥 고개만 저었다. 가서 뭐하게, 대답하는 말투에도 아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부터 결정된 것을 말하는 것처럼 태연한 목소리였다. 생각도 다 해 봤고, 고민도 다 해 봤고, 이제 와서는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을 만큼 오랫동안 고심했던 것처럼. 다만 야마모토는 그런 줄도 알지 못했지만.

 

  – 그럼 나도...

  – 넌 오지 마.

  – 왜?

  – 난 네가 안 왔으면 좋겠어.

 

  야마모토는 휴대전화를 들고 마루로 나왔다. 아버지는 가게에 나가셨으니 낮 동안에는 집에 아무도 없었다. 이시다는 게임에 빠졌을 테니 방해하지 않겠지. 그는 익숙한 번호를 꾹꾹 눌렀다. 실제로 걸었던 건 한 번뿐이지만 끝내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던 건 몇 번인지 셀 수도 없었다. 자다가 일어나도 줄줄 불러댈 수 있을 번호였다. 가끔 한 번씩은 영혼에 새겨진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었다.

  신호음이 길었다. 안 받는 게 아닐까 생각했을 때 갑작스럽게 통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묻는 목소리는 조금 거칠고 급해 보였다.

 

  “...고쿠데라?”

  – ...야마모토, 냐?

  “응, 나야. 잘 지냈어?”

  – 못 지내. 바빠. 끊어.

  “뭐? 자, 잠깐만. 고쿠데라, 나...”

 

  기말고사 성적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에 츠나는 게임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엄마가 방학 때 학원 다니는 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 축 처진 어깨가 그렇게 말했다. 중절모를 쓰고 정장을 차려입은 꼬마가 그 뒤를 따라다니며 회초리로 츠나를 탁탁 때렸다. 조직의 보스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야마모토는 그냥 웃었고, 고쿠데라는 아주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았다.

  몇 달 뒤 고쿠데라의 집에 놀러갔을 때 고쿠데라는 그 게임을 하고 있었다. 츠나도 한 번은 해 봤다는 모양이었다. 기대한 것치고 츠나의 취향은 아니었다. 츠나의 성적은 여전히 오르지 않았고, 취향도 아닌 게임을 집에 가져가 시간을 할애할 여유는 없었다. 야마모토는 그런 설명을 무심코 들으며 고쿠데라가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재밌을 것 같은데. 하여튼 츠나는 특이했다. 나도 해 봐도 돼? 고쿠데라는 순순히 마우스를 넘겼고, 집에 갈 때쯤 아쉬워하는 야마모토에게 무심하게 말했다. 가져가서 더 할래? 빌려 줄게.

 

  “고쿠데라, 보고 싶어.”

 

  전화 너머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언뜻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시끄러워서 잘 들리지 않았다. 야마모토가 안 좋은 타이밍을 고른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하지만.

 

  “...보고 싶어.”

 

  따라가고 싶었다. 함께 가겠다고, 지켜 주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고쿠데라는 어딘지 필사적인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네가 오는 게 싫어. 그는 그렇게 말했다. 너랑 같이 이탈리아에 가는 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야마모토는 이해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고쿠데라라면 반드시 그렇게 느낄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래야 네가 마음이 편하다면.

  옛날에 어떤 만화에서 봤던 것처럼. 사랑해도 헤어질 수 있다면 떨어져 있어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거니까.

  고쿠데라는 빌려 줬던 게임을 받아가지 않았다. 야마모토는 그 게임을 서랍 속 깊숙한 곳에 묻어둔 채 쭉 잊고 있었다. 일부러 고개를 돌렸는지도 모른다. 그 게임은 물론 잘 만든 게임이었지만, 야마모토가 그걸 재미있다고 여겼던 것은 고쿠데라와의 추억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니까. 고쿠데라가 없어도 사랑할 수 있지만 고쿠데라가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스스로 선택했다고는 해도 빈자리는 여전히 아팠다. 난 계속 참고 있어, 고쿠데라. 그래야 네가 마음이 편하다고 했으니까. 대신에 –

탕, 하고 총소리가 들렸다.

 

  “...고쿠데라?”

 

  총소리가 너무 선명해서 아직도 귓속에 메아리가 치는 것 같았다. 아니, 아닐 거야. 야마모토는 전화를 구명줄처럼 부여잡고 고장 난 기계처럼 계속 고쿠데라의 이름을 불렀다. 멀리서 사람들이 소리치는 소리, 싸우는 소리가 났다. 중간 중간 좀 더 작은 총소리가 섞여 있었다. 숨소리가 났다. 귀에 대고 숨을 불어넣듯 생생한 소리였다. 고쿠데라? 야마모토는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띄엄띄엄 끊어질 듯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 ...야마모토.

  “듣고 있어. 고쿠데라, 괜찮은 거야?”

  – 나도, 보고...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전화기를 떨어뜨렸는지 툭툭 구르는 듯한 소리만 들리다 전화가 끊겼다. 야마모토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고쿠데라, 사랑해. 보고 싶어. 정말 보고 싶어.

  이시다는 갑자기 방으로 뛰어든 야마모토를 귀신이라도 본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 왜 그래? 야마모토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옷장을 열었다. 그 안에는 큼직한 가방이 들어 있었다. 고쿠데라가 그렇게 떠난 뒤 그 가방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야마모토는 매년 새 비행기표를 끊어 그 안에 집어넣곤 했다. 유효기간은 1년이니까, 급할 때 급하게 끊는 것보단 나을 거라고, 어쩌면 올해는 쓸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야마모토? 야, 너 어디 가?”

  “공항에.”

  “공항? 뭔 소리야? 야, 너 미쳤어? 갑자기 왜 그래? 어?”

  “우리 아버지한테 말 좀 전해 줘. 아, 그거 너 가져도 돼.”

  “야마모토?!”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야마모토는 가방을 챙겨 들고 아무렇게나 발을 내디뎠다.

  고쿠데라. 나는 떨어져 있어도 괜찮아. 헤어져 있어도 너를 사랑할 수 있어.

  대신에 네가 날 보고 싶다고 말한다면 난 언제 어디서든 한달음에 달려갈 거야. 그리고 –

 

 

 

  간신히 급소는 피했고, 피를 좀 많이 흘렸지만 고비도 넘겼다. 수술이 좀 오래 걸려서 불안했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났다. 만 하루가 지난 시점에서 츠나는 겨우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침대에 누운 고쿠데라는 퍽 창백해 보였지만 곧 나아질 것이다. 이만하길 다행이지.

갑자기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났다. 이런. 휴대전화를 진동으로 돌려놓지 않은 걸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츠나는 당황하며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 너머에서는 더없이 익숙하지만 그래서 더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마모토?”

  – 응, 나야. 츠나, 지금 어디야? 고쿠데라랑 같이 있어?

  “아, 응. 같이 있어. 나야 이탈리아지... 아니, 그건 왜?”

  – 그거 말고. 나도 이탈리아야.

  “...뭐?”

 

  츠나는 거의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야마모토는 지금 막 공항에 내렸다고 했다. 그는 병원 이름과 대략의 위치를 들은 뒤 곧 전화를 끊었다. 공항에서부터 택시를 타고 오겠다는 발상은 몹시도 말리고 싶었으나 야마모토는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야마모토가 병원에 들이닥쳤다. 츠나는 고쿠데라가 다쳤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지금은 쉬는 중이라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야마모토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많이 했나 봐.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그냥 정신이 좀 없었지.”

  “의사는 얼마 안 있으면 깨어날 거라고 하더라. 얼굴은 보고 갈 수 있을 거야.”

  “음, 츠나. 난 안 갈 거야.”

  “...뭐?”

 

  야마모토는 고쿠데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 년 만에 보는 얼굴일 것이다. 이탈리아로 온 이래 고쿠데라는 일본에 간 적이 없었고, 야마모토도 헤어진 뒤 이탈리아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반갑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한 말은 –

 

  “야마모토?”

  “한 번은 고쿠데라가 바라는 대로 해 줬지. 이제 고쿠데라가 내가 바라는 대로 해 줄 차례잖아.”

 

  고쿠데라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야마모토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일어나면 아마 화를 낼 거고, 당장 돌아가라고 소리소리를 지를 테고, 어쩌면 조금은 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처음 고쿠데라를 보내던 그날부터 결심했던 거니까. 만약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고쿠데라.

  만약 네가 날 부른다면, 그래서 내가 너한테 간다면. 고집 센 네가 날 불렀다는 건 정말 엄청난 일이겠지. 그렇게 엄청난 일이,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일어났다는 거겠지. 나는 그런 걸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때 할 수 없었던 말을 지금 하게 해 줘.

  고쿠데라의 손이 움찔 떨렸다. 그가 깨어나려는 모양이었다. 눈가가 가늘게 경련하더니 눈꺼풀 사이가 조금씩 벌어졌다. 야마모토는 숨을 크게 들이키며 최대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연인에게 최고의 웃음을 보여 주고 싶었다.

俺達のJoy - 山本武/獄寺隼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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